
[당선 소감]
‘부캉이’가 처음 모습을 드러낸 날, 우연히도 가족들과 함께 친수공원에 있었습니다. 그날 우리가 마주한 뜻밖의 풍경이 한 편의 글이 되어 이렇게 기쁜 소식으로 돌아올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시간이 흐른 뒤에도 그날의 기억은 마음 한편에 오래 머물렀습니다. 낯선 존재의 출현에 놀라고 반가워했던 마음에서 시작해, 우리가 자연과 더불어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를 조금씩 헤아려 보게 되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이 세계에는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는 수많은 삶이 저마다의 시간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때로는 서로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한 채, 때로는 예기치 못한 순간에 마주치면서요. 공존이란 어쩌면 그 낯선 만남을 기꺼이 반기고, 서로에게 조금씩 자리를 내어주는 일에서 시작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날의 작은 우연을 귀한 인연으로 만들어주신 코스미안 뉴스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이 뜻밖의 행운을 곧 우리 가족에게 찾아올 또 하나의 사랑스러운 존재, 첫 조카 ‘꿀떡이’에게 선물하고 싶습니다. 아직 만나지 못한 너에게, 앞으로 네가 마주할 수많은 낯선 존재들이 두려움보다 경이로움으로 다가오기를. 네가 살아갈 세계가 지금보다 조금 더 너그럽고 다정한 곳이기를.
[칼럼] 친수공원과 상어의 출현
한 손에는 테이크아웃 아이스 아메리카노 다른 한 손에는 스마트폰. 주말의 부산 북항 친수공원을 찾는 사람들의 표정은 대체로 여유롭고 평화롭다. 정갈하게 깔린 보도블록을 따라 걸어가면 도심 건물들 사이로 맑고 은은하게 반짝이는 수로가 눈에 들어온다. 거친 파도 소리는 들리지 않고 특유의 비린내도 없다. 딱 인간이 안락하다고 느낄 만큼만 정돈된 이 멋진 산책로에서 시민들은 바다가 주는 다정한 휴식을 온전히 누린다. ‘물이 가까운 공간’을 뜻하는 친수(親水)라는 이름 그대로, 공원은 바다를 우리 삶의 가장 가까운 자리로 끌어다 놓은 문명의 세련된 선물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평화롭고 근사한 정원 한복판에 최근 회복하기 어려운 기이한 균열이 하나 생겼다. 바다의 지배자이자 거친 야생의 대명사인 상어 한 마리가 인공 수로의 얕은 물길을 따라 헤엄치기 시작한 것이다. 산책을 즐기던 사람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발걸음을 멈추고 스마트폰을 들어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미디어 역시 뉴스룸 한쪽의 가벼운 스케치 기사로 ‘도심 수로의 깜짝 손님’이라는 식의 위트 있는 해프닝을 타전했다. 바다 생물이 도심 수로까지 들어온 희귀한 구경거리라는 반응이 대다수였다.
하지만 정돈된 공원 안내판과 매끈한 벤치 바로 옆, 불과 몇 미터 남짓한 수로 바닥을 슬금슬금 이동하는 그 거친 잿빛 신체는 결코 아쿠아리움의 귀여운 볼거리나 일회성 이벤트가 아니었다. 그것은 최첨단 명품관의 깨끗한 유리문 너머로 느닷없이 흙발의 야생 맹수가 걸어 들어온 듯한 감각적 혼란에 가까웠다. 문명이 안전하다고 확신했던 안과 밖의 경계를 단 한 번의 지느러미질로 베어버린 미학적인 지각변동이었던 셈이다.
이 해프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부산 북항이라는 공간이 가진 역사적 레이어를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본래 이 자리는 거친 물길이 트여 있던 검은 바다였으며, 근대화 이후에는 무수한 무역선과 화물 컨테이너가 오가던 산업의 최전선이었다. 도시는 재개발이라는 이름 아래 그 산업적 찌꺼기와 거친 수심을 콘크리트로 매립하고 그 위에 친수공원이라는 아름다운 정원을 새로 그려 넣었다. 발터 벤야민이 19세기 파리의 아케이드 거리를 분석하며 지적했듯, 근대 도시는 거칠고 위험한 자연을 매끈하게 포장하여 시민들이 안전하게 관람하고 소비할 수 있는 ‘상품 파노라마’로 변환해왔다. 북항 친수공원 역시 바다라는 무자비한 자연을 도시민의 휴식을 위한 세련된 관상용 진열창으로 재배치한 현대적 아케이드의 전형이다.
우리가 아무런 의심 없이 사용하는 친수라는 언어는 실로 기묘하고도 이기적인 착각을 전제로 성립된다. 바다와 친해진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바다가 가진 통제 불가능한 위험과 미지의 심연을 완전히 탈색시킨 뒤 오직 인간에게 안락한 상태만을 선택적으로 취하겠다는 일방적인 선언이다. 도시는 바다를 예쁜 정원으로 가꾸기 위해 거대한 방파제를 세우고 정교한 수문으로 물길의 높낮이를 제어하며 수로 바닥을 자연의 바위 대신 매끄러운 시멘트로 도배했다. 그 공간에서 바다는 오직 산책자의 미감을 만족시키는 무결하고 조용한 풍경이어야만 했다. 도시는 바다를 향해 일종의 정중한 각서를 요구했던 셈이다. 당신을 딱 이 정도의 깊이와 무해함으로만 사랑하겠다는 각서 말이다.
상어의 출현은 인간이 혼자 작성하고 스스로 서명했던 이 일방적인 계약서가 얼마나 허약한 환상이었는지를 폭로했다. 보도블록 바로 아래, 조용한 물결 위에 상어가 그어놓은 잿빛 지느러미의 파문은 도시가 아무리 완벽하게 바다를 재배치하고 길들였다고 자만할지라도 우리가 딛고 서 있는 시멘트 밑의 물은 여전히 경계도 법률도 도시계획도 갖지 않은 무자비한 심해의 일부라는 사실을 직관적으로 증명했다. 인간은 바다 옆에 예쁜 공원을 지었지만 바다는 단 한 번도 공원의 일부가 되기로 동의한 적이 없었다.
이 풍경이 주는 진짜 위트는 상어를 바라보는 현대인의 완벽하게 차단된 감각적 포즈에 있다. 수로 변에 모여든 사람들은 손에 스마트폰을 쥐고 상어를 촬영하며 즐거워했다. 렌즈라는 안전한 프레임과 보도블록이라는 물리적 높이 덕분에 사람들은 자신이 수족관의 유리창 너머에서 안전한 구경을 하고 있다고 믿었다. 대단한 착각이다. 아쿠아리움의 유리창은 인간과 상어 사이에 수두룩한 인공 장치와 수압 통제 시스템을 놓아두지만, 친수공원의 수로는 단지 몇 계단만 내려가면 곧바로 야생의 이빨과 피부가 닿는 생생한 바다다.
우리는 스펙터클을 소비하는 데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눈앞에 도달한 거대한 야생조차 재미있는 콘텐츠로 변환하여 감각의 위험을 유예시킨다. 마치 그 위험조차 SNS의 숏폼 영상으로 가공될 수만 있다면 내 삶에는 아무런 타격도 주지 못할 것이라 믿는 현대인의 기이한 무감각함이다. 화면을 꺼버리면 그만인 OTT의 스릴러 영화와 달리 수로 바닥을 쓸고 지나가는 상어의 지느러미는 실재하는 생명이며 언제든 문명의 편안함을 무너뜨릴 수 있는 날것의 물리력이다.
사회학자 및 생태철학자들의 시선에서 볼 때, 이 사건은 기후 위기와 환경 변화가 가져온 자연의 거꾸로 된 역습이기도 하다. 지구 수온이 상승하고 연안의 생태계가 뒤흔들리면서 먹이를 찾아 도심 수로 깊숙이 들어온 이 낯선 생물은, 인간이 지구라는 거대한 생태 시스템에 가한 균열이 결국 어떤 방식으로든 우리의 산책로 밑바닥까지 환류되어 돌아오는가를 증명한다. 문명은 자연을 콘크리트 외벽 뒤로 밀어냈다고 믿었지만, 자연은 도시가 만든 그 정교한 물길을 따라 역으로 문명의 안방을 찾아온 셈이다.
상어가 나타난 날, 수로 변을 감싸고 있던 공기는 놀라움과 유희 그리고 언어화되지 않은 기묘한 불안감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단순히 희귀한 바다 생물을 마주했을 때의 일시적인 호기심이 아니었다. 내가 단단하게 발을 딛고 서 있는 이 안전하고 쾌적한 도시의 밑바닥에 언제든 인간의 제어 범위를 뛰어넘는 생명이 유유히 스며들 수 있다는 근원적인 생경함, 즉 내 삶의 통제권을 상실했을 때 찾아오는 아득한 생체적 반응이었다. 도시가 아무리 수문을 닫고 방파제를 높여도 자연의 흐름은 인간이 그어놓은 가짜 도면을 비웃듯 언제든 문명의 가장 깊숙한 안방으로 미끄러져 들어올 수 있다.
이제 우리는 친수라는 언어가 감추고 있던 본래의 정체를 다시 물어야 한다. 바다와 친해진다는 것은 그것을 인간의 입맛에 맞게 유순하게 길들여 안락한 휴식처로 가두어두는 일이 아니다. 도심 수로 한복판에 불쑥 모습을 드러낸 상어의 출현을 한낱 통제 실패나 일회성 해프닝으로 치부해버리기 전에 바다란 본래 인간의 계산과 설계를 아득히 뛰어넘는 미지의 세계임을 겸손히 인정하는 것, 그리고 언제든 그 예기치 않은 위험과 야생성이 문명의 틈새로 침입할 수 있음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불편한 존중이야말로 진짜 친수의 시작이다.
북항의 인공 수로는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완벽한 정원이기를 멈추고 다시 거칠고 깊은 바다로 돌아갔다. 그 짧은 순간 상어 하나가 수면에 남기고 간 파문은 산책로 위의 우리에게 무심하게 그러나 매우 날카롭게 묻고 있다. 완벽하게 안전하다고 믿었던 도시라는 거대한 환상 속에서 우리는 과연 세계의 거칠고 날카로운 야생을 마주할 최소한의 겸손과 최소한의 준비를 갖추고 있는가.


